향수 유통기한 — 언제까지 쓸 수 있고, 언제 버려야 하는지
선물 받고 몇 번 뿌리다 만 향수가 서랍에 있습니다. 3년쯤 됐는데 아직 반이 남았습니다. 써도 될까요.
향수에는 우유처럼 딱 떨어지는 날짜가 없습니다. 수명을 정하는 건 제조일이 아니라 그동안 어디에 뒀는지입니다.
병에 적힌 숫자는 유통기한이 아닙니다
향수 상자나 병 아래에는 대개 배치 코드가 찍혀 있습니다. 제조 시점을 브랜드가 내부적으로 추적하려고 붙인 번호이지, 언제까지 쓰라는 표시가 아닙니다.
국내 화장품 표기 기준으로는 개봉 후 사용기간을 뜻하는 기호가 붙기도 합니다. 12M, 24M처럼 적힌 것이 그것인데, 이건 그 기간이 지나면 상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때까지는 품질을 보증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실제 수명은 알코올 농도, 향료 구성, 보관 환경에서 결정됩니다. 조건이 좋으면 개봉 후 5년이 지나도 멀쩡한 향수가 있고, 창가에 뒀다면 1년 만에 못 쓰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날짜를 세는 것보다 상태를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상했는지 확인하는 순서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면 대부분 판단이 됩니다.
색부터 봅니다. 원래보다 눈에 띄게 진해졌거나 갈색기가 돌면 산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다만 원래 색이 짙은 앰버 계열은 이 기준이 잘 통하지 않으니 참고만 하세요.
첫 향을 확인합니다. 손목이 아니라 종이나 티슈에 한 번 뿌리고 10초 뒤에 맡아 보세요. 시큼하거나 식초 비슷한 냄새, 알코올만 강하게 튀어나오는 느낌이면 톱 노트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남는 향을 봅니다. 30분 뒤에도 원래 알던 향이 돌아오면 톱 노트만 상한 것이라 실내에서는 쓸 수 있습니다. 반대로 30분 뒤에도 냄새가 어긋나 있으면 베이스까지 갔다는 뜻이므로 정리하는 편이 낫습니다.
피부에 발랐을 때 가렵거나 붉어진다면 향과 무관하게 그만 쓰세요. 산화된 향료 성분이 자극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열에 따라 수명이 두 배씩 차이납니다
같은 조건에 둬도 어떤 향수는 먼저 상합니다. 향료 분자의 무게 차이 때문입니다.
시트러스 계열을 좋아한다면 처음부터 작은 병을 사는 편이 낫습니다. 100ml를 3년에 걸쳐 쓰면 뒤쪽 절반은 처음 맡은 향과 다른 향이 됩니다.
- 시트러스·아쿠아틱·그린 — 가장 먼저 무너집니다. 레몬, 베르가못 같은 감귤 계열 원료는 빛과 산소에 특히 약합니다. 여름용으로 산 향수를 겨울 내내 방치했다가 이듬해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여기 해당합니다.
- 플로럴·프루티 — 중간입니다. 관리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 앰버·우디·머스크·파우더리 — 가장 오래 버팁니다. 무거운 원료 위주라 산화가 느리고, 일부는 시간이 지나며 향이 둥글어지기도 합니다.
- 농도도 영향을 줍니다. 향료 비율이 높은 퍼퓸·오드퍼퓸이 오드뚜왈렛보다 오래 가는 편입니다.
가장 나쁜 자리는 욕실입니다
향수를 상하게 하는 건 빛, 열, 온도 변화, 공기 이 넷입니다. 욕실 선반은 이 중 셋을 한꺼번에 겁니다. 샤워할 때마다 온도와 습도가 크게 오르내리기 때문입니다.
화장대 위 창가도 흔한 실수입니다. 예쁘게 세워 두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직사광선이 드는 자리는 시트러스 향수를 몇 달 만에 바꿔 놓습니다. 병이 투명하거나 밝은 색일수록 빠릅니다.
권할 만한 자리는 서랍이나 옷장 안쪽입니다. 어둡고 온도가 일정하면 조건이 갖춰집니다. 원래 상자가 있다면 버리지 말고 그대로 넣어 두세요. 상자는 포장이 아니라 차광 장치입니다.
세워서 보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눕히면 향액이 뚜껑 쪽 고무 패킹에 계속 닿아 부식이 생기고, 그 틈으로 공기가 들어갑니다.
냉장고는 권하지 않습니다. 서늘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면서 생기는 온도 차가 오히려 향료를 상하게 합니다. 화장품용 소형 냉장고에 넣고 안 꺼낼 게 아니라면 서랍이 낫습니다.
공기가 들어가는 만큼 줄어듭니다
절반 이상 쓴 향수가 유난히 빨리 변하는 이유는 병 안의 빈 공간이 전부 공기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향액이 적을수록 산화가 빨라집니다.
그래서 큰 병이 항상 이득은 아닙니다. 100ml를 반값처럼 느껴져 샀는데 3년째 절반이 남아 있다면, 실제로는 30ml짜리를 다 쓴 것보다 손해입니다. 하루에 두 번 뿌리는 사람 기준으로 50ml는 대략 1년 안에 소진되니, 이 정도가 무난한 기준입니다.
스프레이가 아닌 뚜껑 열어 찍어 쓰는 방식은 그때마다 공기가 들어가고 손가락 유분도 섞입니다. 빈티지 향수가 아니라면 스프레이 쪽이 관리에 유리합니다.
소분해서 들고 다니는 소분장은 편하지만 수명은 짧아집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공기와 섞이고, 가방 안은 온도 변화가 큽니다. 소분한 분량은 한두 달 안에 쓸 만큼만 담으세요.
샘플이나 시향지로 받은 소량은 밀봉이 약해 더 빨리 갑니다. 모아 두지 말고 받은 계절 안에 쓰는 편이 낫습니다.
상한 향수를 버리기 전에
피부에 쓰기 어려워진 향수도 쓸 곳이 남아 있습니다. 향이 완전히 어긋난 게 아니라 톱 노트만 무너진 정도라면 옷장 안쪽이나 서랍에 뿌려 두는 용도로는 충분합니다. 코트 안감이나 신발장, 쓰레기통 주변에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옷에 직접 뿌리는 건 조심하세요. 산화된 향료는 밝은 색 옷이나 실크에 얼룩을 남길 수 있고, 향수 얼룩은 대개 지워지지 않습니다.
버릴 때는 내용물과 병을 나눕니다. 알코올이 주성분이라 하수구에 다량을 그대로 붓는 건 권하지 않고, 신문지나 휴지에 흡수시켜 일반 쓰레기로 처리한 뒤 유리병만 분리배출하는 방식이 무난합니다. 스프레이 헤드는 플라스틱이라 따로 떼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병은 다 쓸 수 있는 크기로 사세요. 향수를 오래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향수 지속력 편에서 뿌리는 쪽을 다뤘습니다.
향수 제품 살펴보기
위 기준에 해당하는 제품들입니다. 가격은 시점에 따라 달라지니 링크에서 확인하세요.
자주 묻는 질문
- 개봉하지 않은 향수는 몇 년까지 괜찮나요?
- 밀봉 상태로 어둡고 서늘한 곳에 뒀다면 5년 이상 지나도 쓸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향수에는 법으로 정해진 소비기한이 없고 보관 조건이 수명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미개봉이어도 창가나 욕실에 뒀다면 훨씬 빨리 변합니다.
- 향수 색이 진해졌는데 버려야 하나요?
- 색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앰버나 우디 계열은 원래 색이 짙고 시간이 지나며 더 진해지기도 합니다. 종이에 뿌려 첫 향과 30분 뒤 향을 확인해서, 30분 뒤에도 원래 알던 향이 돌아오면 실내용으로는 계속 쓸 수 있습니다.
- 향수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오래 가나요?
- 일반 냉장고는 권하지 않습니다. 꺼냈다 넣었다 하면서 생기는 온도 변화가 향료에 더 나쁘고, 음식 냄새가 밸 수 있습니다.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서랍이나 옷장 안쪽이 더 안전한 자리입니다.
- 반쯤 쓴 향수를 다른 병에 옮겨 담아도 되나요?
- 빈 공간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공기와 접촉하므로 득실이 엇갈립니다. 옮긴다면 소독한 유리 용기에 최소한의 조작으로 담고, 한두 달 안에 쓸 분량만 나누는 편이 낫습니다.